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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돌돌

이유없이 허한 날이 많아지더니, 이유없이 아픈 날이 많아졌다. 이유가 없을리 없을 터, 역시 술때문이야. 그래 술. 그렇다면 술을 왜 마셔? 그야, 화가 나니까 통조림을 그만 먹고 밥을 먹으라고 친구가 말했다 고양이처럼 통조림을 맛있게 먹었다 고양이처럼 몸을 돌돌말아서 고양이 등에 대고 잤다 돌돌돌 다람쥐가 쳇바퀴 위에서 달리는 꿈을 꾸었다 다람쥐는 쳇바퀴가 놀이라는데 뭐 인간 러닝머신 같은 걸까 난 어쩐지 쳇바퀴도 러닝머신도 내려오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에히리 프롬, 장혜경 옮김

에히리 프롬, 장혜경 옮김 (2020),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나무생각 목차서문 - 라이너 풍크 01 인간은 타인과 같아지고 싶어한다02 인간의 본질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다03 진짜 자유는 진짜 인격의 실현이다04 자아는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만큼 강하다05 인간은 자신의 인격을 시장에 내다 판다07 진짜와 허울의 차이를 보다 참고문헌출처 p. 20 사랑이란 그 사랑에 관여한 사람들의 온전함과 현실을 둘 다 보존하는 유일한 형태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복종하거나 그에게 권력을 휘두르면서도 '사랑'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 사람은 - 상대에게 복종하는 사람이건 상대를 지배하는 사람이건 - 자신의 온전함과 독립이라는 인간의 기본 특성을 상실한다. 진정한 사랑에서는 타인과의 연..

카테고리 없음 2020.05.02

김민정, <나는 뒤끝 짱 있음>

나는 뒤끝 짱있음- 곡두 6 김민정 모닝콜은 있고 굿모닝은 없음 굿모닝은 있고 기지개는 없음기지개는 있고 휘파람은 없음없음, 없음, 없는데 참개똥은 있고 개는 없음개는 있고 개똥 주인은 없음개똥 주인은 있고 개똥 치운 주민은 없음개똥 치운 주민은 있고 개똥치운 주민에게 사과하는 개똥 주인은 없음없음, 없음, 없는데 참출근은 있고 설렘은 없음설렘은 있고 잔고는 없음잔고는 있고 이자는 없음이자는 있고 임자는 없음없음, 없음, 없는데 참애무는 있고 섹스는 없음섹스는 있고 삽입은 없음삽입은 있고 느낌은 없음느낌은 있고 사랑은 없음없음, 없음, 없는데 참소등은 있고 퇴근은 없음퇴근은 있고 수면은 없음수면은 있고 숙면은 없음숙면은 있고 단꿈은 없음없음, 없음, 없는데 참환각은 있고 환상은 없음환상은 있고 기대는 없..

박준, <그해 봄에>

얼마 전 손목을 깊게 그은 당신과 마주 앉아 통닭을 먹는다 당신이 입가를 닦을 때마다 소매 사이로 검고 붉은 테가 내비친다 당신 집에는 물 대신 술이 있고 당신이 사랑했던 사람 대신 내가 있다 한참이나 말이 없다 내가 처음 던진 질문은 왜 봄에 죽으려 했냐는 것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당신이 내게 고개를 돌려 그럼 겨울에 죽을 것이냐며 웃었다 마음만으로는 될 수도 없고 꼭 내 마음 같지도 않은 일들이 봄에는 널러 있었다

김민정, <대화가 안 되면 소화라도>

대화가 안 되면 소화라도 -곡두 40 명동 롯데 에비뉴얼 앞에서 중국인 관광객들이 딸기를 사는 봄이다. 빨간 플라스틱 소쿠리 안에 담긴 딸기가 랩에 싸여 있고 손에 빨간 소쿠리를 하나나 둘씩 챙긴 중국인 관광객들이 차례로 버스에 오르는 낮이다. 버스에서 먹으려나. 그렇다면 호텔 방에 버려지는 빨간 소쿠리겠지 빨간 딸기보다는 빨간 소쿠리라, 캄보디아에서 물고기 목각은 안 사고 물고기 잡는 통발 두 개 사온 뒤부터는 뭐라도 살 때 담아주는 그네들의 비닐봉지 그걸 재미 삼아 악착같이 모아두게 되었는데 몽골에 단체 여행 다녀온 이들이 내민 목에 방울 달린 야크 털로 만든 순록 인형이랑 야크 털로 짠 양말이랑 덧신이랑 캐시미어 머플러랑 벙어리장갑이랑 비닐봉지도 기억들 하시겠지. 빨간 세로줄이었는데 파란 세로줄이었..

심보선, <카르마>

카 르 마 심보선 언제부턴가 귀가 잘 안 들린다 그녀는 내가 말귀를 못 알아먹는다고 힐난할 때가 많았다 수은 중독을 수음 중독으로 듣고 "야하다" 했다가 헤어질 뻔했다 헤어질 뻔한 적이 많으면 결국 헤어진다 둘만의 카르마라는 게 있다 카르마를 가리마로 듣고 "나는 왼쪽이야" 했더니 깔깔 웃으며 그녀가 나를 안았다 "나의 카르마여, 나의 왼쪽에 누우렴" 여행 중 길을 잃었을 때 우리를 기차역까지 태워준 쌍둥이 형제 형인지 동생인지 이름이 미구엘이었다 미구엘은 카르마를 믿는다고 했다 이름은 천사인데 우리에게 침을 뱉고 안경을 훔쳐 간 집시도 이름이 천사일 수 있었는데 라파엘, 돈을 줄 테니 부디 우리에게 은총을 우리가 헤어질 뻔해도 끝내 헤어지지 않고 결혼할 수 있도록 성당 앞 언덕 아래 촛불 든 광신도들처..

김경주, <생가>

생 가 김경주 안은 어두워서 밖을 숨겼다 죽은 자의 입안에 쌀 한 줌을 가만히 넣어주듯이 구름은 온다 저녁이 되면 오래된 종(鍾)에서만 주르르 흘러나온다는 물처럼 자신을 넘어버린 울음은 더 이상 자신에게도 들리지 않는다 누군가의 생가라고 한다 나 혼자 지나간 것은 아니다 그는 누구였을까 바람 밖으로 먹놀이*가 울린다 죽은 자들이 다가와 종(鍾)을 핥고 있는 거다 썩은 육신에 꿈이 붐비면 삭아가는 관(棺)도 저렇게 고인 물을 죽음 밖으로 흘려보내는 것일까 화장(火葬)된 구름들이 물로 흘러내리며 공중의 비문(碑文)이 된다 마지막 발짓이 허공을 헤엄쳐 갈 때 몸 안에 아무렇게나 흘러다니던 구멍 하나가 천천히 목구멍으로 넘어왔을 것이다 나는 울다가 썩어버린 사람을 바람으로 본다 * 한 공간에서 주파수가 서로다른..

금세공사의 경(Paṭhamasuvaṇṇakārasutta) ①

3 : 100a 금세공사의 경(Paṭhamasuvaṇṇakārasutta) ① 1. [세존] “수행승들이여, 금광에는 진흙과 모래, 자갈과 돌조각의 거친 불순물이 있다. 불순물을 제거하는 자나 그 불순물을 제거하는 제자가 통 가운데 그것을 뿌려서 세척하되 두루 세척하고 완전히 세척한다. 그것이 제거되고 그것이 없어지더라도 금광의 미세한 자갈과 굵은 모래의 중간 불순물이 있다. 불순물을 제거하는 자나 그 불순물을 제거하는 제자가 통 가운데 그것을 뿌려서 세척하되 두루 세척하고 완전히 세척한다. 그것이 없어지더라도 금광의 미세한 모래와 검은 반점의 작은 불순물이 있다. 불순물을 제거하는 자나 그 불순물을 제거하는 제자가 통 가운데 그것을 뿌려서 세척하되 두루 세척하고 완전히 세척한다. 그것이 제거되고 그것이..

담마코리아, 3일 코스

6/28 서울에서 진안 터미널로 바로 가는 고속 버스(15,000원)는 2대. 아침 10시 10분 차를 예매했지만 전날 숙취때문에 못일어나서 누워서 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꾸역꾸역 일어나서 열한시 반 기차를 다시 예매했다. 무사히 용산역에서 전주역으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에 탑승. 17600원 ​ ​​ 이번 집중수행에서 통증은 참을 만했고, 생각이 주 무대였다. 하룻밤도 잠을 잘 자지 못했다. 느슨해지는 순간 어김없이 생각이 찾아왔다. 다시 긴장했고, 호흡했고 긴장했고 감각을 느꼈다. 종소리를 날이 밝기를 기다리고 종이 치면 명상 홀로 걸어갔다. 홀에서 하루 열한시간 반을 무조건 앉았지만, 다시 호흡-생각-긴장-감각을 반복했다. 한 시간에 호흡과 감각을 느끼는 것은 합하여 1분쯤이고 나머지 59분은 생각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