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 살고 싶은 문장들/시

심보선, <카르마>

lay_lee 2020. 4. 22. 00:27

카 르 마

 

심보선

 

언제부턴가 귀가 잘 안 들린다

 

그녀는 내가 말귀를 못 알아먹는다고

힐난할 때가 많았다

 

수은 중독을 수음 중독으로 듣고

"야하다" 했다가 헤어질 뻔했다

 

헤어질 뻔한 적이 많으면 결국 헤어진다

둘만의 카르마라는 게 있다

 

카르마를 가리마로 듣고

"나는 왼쪽이야" 했더니

깔깔 웃으며 그녀가 나를 안았다

 

"나의 카르마여, 나의 왼쪽에 누우렴"

 

여행 중 길을 잃었을 때

 

우리를 기차역까지 태워준 쌍둥이 형제

형인지 동생인지 이름이 미구엘이었다

 

미구엘은 카르마를 믿는다고 했다

이름은 천사인데

 

우리에게 침을 뱉고 안경을 훔쳐 간 집시도

이름이 천사일 수 있었는데

 

라파엘, 돈을 줄 테니 부디 우리에게 은총을

 

우리가 헤어질 뻔해도 끝내 헤어지지 않고

결혼할 수 있도록

 

성당 앞 언덕 아래

촛불 든 광신도들처럼 펼쳐진 야경은

안경 없이도 얼마나 선명했던가

 

그때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너무 다른 역경들을 통과해

너무 늦게 만났다

 

야경이건 안경이건 역경이건

무심한 내 귀는 이제 상관하지 않는다

 

내가 그녀에게 욕한 건 단 한 번

그녀가 나에게 욕한 것도 단 한 번

한심한 내 귀는 아직도 잊지 않는다

 

저주보다 축복이 휠씬 많았건만

둘만의 카르마라는 게 있다

 

지금 내 왼쪽엔 아무도 없다

그녀가 죽었다고 상상한다

그녀가 살아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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