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 르 마
심보선
언제부턴가 귀가 잘 안 들린다
그녀는 내가 말귀를 못 알아먹는다고
힐난할 때가 많았다
수은 중독을 수음 중독으로 듣고
"야하다" 했다가 헤어질 뻔했다
헤어질 뻔한 적이 많으면 결국 헤어진다
둘만의 카르마라는 게 있다
카르마를 가리마로 듣고
"나는 왼쪽이야" 했더니
깔깔 웃으며 그녀가 나를 안았다
"나의 카르마여, 나의 왼쪽에 누우렴"
여행 중 길을 잃었을 때
우리를 기차역까지 태워준 쌍둥이 형제
형인지 동생인지 이름이 미구엘이었다
미구엘은 카르마를 믿는다고 했다
이름은 천사인데
우리에게 침을 뱉고 안경을 훔쳐 간 집시도
이름이 천사일 수 있었는데
라파엘, 돈을 줄 테니 부디 우리에게 은총을
우리가 헤어질 뻔해도 끝내 헤어지지 않고
결혼할 수 있도록
성당 앞 언덕 아래
촛불 든 광신도들처럼 펼쳐진 야경은
안경 없이도 얼마나 선명했던가
그때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너무 다른 역경들을 통과해
너무 늦게 만났다
야경이건 안경이건 역경이건
무심한 내 귀는 이제 상관하지 않는다
내가 그녀에게 욕한 건 단 한 번
그녀가 나에게 욕한 것도 단 한 번
한심한 내 귀는 아직도 잊지 않는다
저주보다 축복이 휠씬 많았건만
둘만의 카르마라는 게 있다
지금 내 왼쪽엔 아무도 없다
그녀가 죽었다고 상상한다
그녀가 살아있다고 믿는다
'따라 살고 싶은 문장들 >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민정, <나는 뒤끝 짱 있음> (0) | 2020.05.02 |
---|---|
Lay, <가진 사람> (0) | 2020.05.01 |
박준, <그해 봄에> (0) | 2020.04.30 |
김민정, <대화가 안 되면 소화라도> (0) | 2020.04.29 |
김경주, <생가> (0) | 2020.04.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