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가 안 되면 소화라도
-곡두 40
명동 롯데 에비뉴얼 앞에서
중국인 관광객들이 딸기를 사는 봄이다.
빨간 플라스틱 소쿠리 안에 담긴 딸기가
랩에 싸여 있고
손에 빨간 소쿠리를 하나나 둘씩 챙긴
중국인 관광객들이 차례로 버스에 오르는 낮이다.
버스에서 먹으려나.
그렇다면 호텔 방에 버려지는 빨간 소쿠리겠지
빨간 딸기보다는 빨간 소쿠리라,
캄보디아에서 물고기 목각은 안 사고
물고기 잡는 통발 두 개 사온 뒤부터는
뭐라도 살 때 담아주는 그네들의 비닐봉지
그걸 재미 삼아 악착같이 모아두게 되었는데
몽골에 단체 여행 다녀온 이들이 내민
목에 방울 달린 야크 털로 만든 순록 인형이랑
야크 털로 짠 양말이랑 덧신이랑
캐시미어 머플러랑 벙어리장갑이랑
비닐봉지도 기억들 하시겠지.
빨간 세로줄이었는데 파란 세로줄이었는데
쪼글쪼글했는데
반투명인데 불투명한 냄새였는데
펴질까.
펴 뭐 해.
팔자 주름도 아니고서
담요 아래 그걸 넣고
담요 위에 없는 그걸 다리려는 건
아무 뜻도 없는 제스처라,
잘 지내냐는 물음.
안 전하는 것도 안부일 것이어서 나는
40개에 29,900원 하는 영의정 오메기떡이랑
32팩에 32,900원 하는 안동 간고등어랑
홈쇼핑 채널 번갈아 바쁘게 결제 중인데
죽을 만큼 힘들다는 울음.
아직 안 죽고 살아 있었냐는 응답.
이미 그때 나는 죽었는데 몰랐냐는 답응.
그나저나 너 지금 '만큼'이라 한 거 맞냐는 되물음.
기억을 부르는 만큼은 화를 돋우는 만큼.
내게 죽을 만큼이라 하면
나올 똥이 안 나와 응급실 실려 가던 고3 때
다물 줄은 알고 벌릴 줄은 모르던
썩은 내 똥꼬라는 입의 각도 같은 것.
너의 죽을 만큼이라 하면 글쎄
너는 어떤 장면을 예기치 않게 얘기할까.
네가 만큼이라 하니 나는 만치라 쓴다.
네가 유치라 하니 나는 유치장이라 쓴다.
쓰니까 또 말이 없구나, 그 말 먹음.
말 먹어 잡숴버리는 그 말아먹음.
모질지 못함으로 딱 한마디했다.
청순한 청승으로 딱 한마디 더 했다.
똥을 싸.
그냥 똥이나 싸라고.
웃겨?
하긴 저도 변비인 주제에
둘코락스 에스 두 알 먹는 거
한 번에 네 알씩 먹는 내 주제에.
똥을 싸고 싶다.
그냥 똥이나 싸고 싶다.
그러고 보면
서로 똥 권하고 서로 똥 바라는 사이
있기야 어디 있겠지.
다들 안 나와서 못 싸는 날은 있어도
나오는데 안 싸는 날은 없겠지.
잘라낼 대장이나 꼬인 소장 걱정은
안 해도 될 만큼이니까
보다 단순해지고 있다는 얘기겠지.
단순해지기 위해 더욱 단순해지기까지
감정은 너와 나를 변하게 하지만
똥은 너와 나에게서 변화를 모르게 하지.
똥이여 건강한 너의 일관성이여.
너의 그 우직스러움을 칭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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