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쪽-123쪽
훈습 기간에 내가 중얼거린 말 중에 '무력한 채로 머물기'가 있었다. 이집트뿐 아니라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서나 부정적 감정을 투사하거나, 문제를 외재화하거나, 공격성을 행동화하는 경우와 맞닥뜨리게 마련이었다. 그럴 때 그 사실을 회피하거나 부인하지 않으면서, 가학적으로 보복하거나 자기 파괴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무력한 채로 머물기'에는 억울함을 감수하기, 나를 해명함으로써 타인을 통제하려 하지 않기의 세목이 있었다.
훈습 초기에 중국에서 택시 기사가 잔돈이 없다고 말했을 때 기어이 거스름돈을 받아 낸 일이 있었다. 그때는 무의식에 억압해온 분노를 인식하던 시기여서 그 행위에도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그 후 내가 정당하다는 이유로 상대에게 화를 내는 것이 옳은 일인가 생각해 보았다. 상대의 부당함이 나의 분노를 정당화시키지는 않으며, 상대의 언행과 나의 감정을 분리시킬 줄 모르는 행위였음을 알게 되었다.
분노가 의식 속으로 통합된 후에는 바가지 쓰기가 약간의 돈을 더 주는 일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전에는 바가지를 돈의 문제가 아니라 속임과 통제의 문제로 인식했고, 거기서 촉발된 불안감 때문에 과잉 반응했음을 알아차렸다. 타인의 언행과 나의 감정을 분리시키는 일은 훈습 기간에 특히 유념한 대목이었다. 그동안 타인의 '충탐해판*'을 불편해하고, 남의 말에 깊이 영향을 받았던 이유가 내면세계와 외부 현실 사이의 '경계'가 없어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외부에서 들리는 말을 내면에서 울리는 권력자의 목소리처럼 인식했다는 사실을 부모 이미지와 분리된 후에야 알았다.
그런 사실을 명명백백히 알고 있어도 근거 없는 분노나 시기심의 행동화와 만나면 아픈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때, 무력한 채 머물면서 내가 했던 작업은 정작 그들이 아픈 사람임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화살이나 칼날 같은 말을 쏟아 내는 사람의 내면에는 그런 감정들만 가득 차 있으며, 그것을 스스로 소화시킬 줄 몰라 외부로 쏟아 내는 것이었다. 밖으로 쏟아 내는 것이었다. 밖으로 쏟아 내는 것보다 더 많이, 이미 내면에서 자신을 베고 있을 거였다. 예수님도 말씀하셨다. 사람은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라고. 그 지점에 머무르면 무력한 채 머무는 것도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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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김형경이 만든 사자성어랄까? 충고, 탐색, 해석, 판단의 앞 글자만 따서모아 놓은 사자성어인데, 책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충고, 탐색, 해석, 판단의 앞 글자를 모은 그 단어는 한데 묶어 놓고 보면 방어의 언어라는 사실이 더 잘 이해되었다.
충고는 자기 생에서 실천해야 하는 덕목들을 남에게 투사하는 것이고,
탐색은 상대에게 존재할지도 모르는 위험 요소를 경계하는 일이었다.
해석은 자기 생각과 가치관을 타인에게 덧씌우는 일이고,
판단은 제멋대로 남들을 평가하고 재단하는 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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